아버지의 산사랑은 끝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산에 가지 말라는 것은 집에서 박제인형처럼 지내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바람만 쌩하고 불어도 엄마는 산이 위험하다며 아빠를 말리려 들었고 아빠는 좁은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고양이처럼 또 산으로 가셨다.
엄마는 아빠가 아무래도 산에 우리가 모르는 좋은 것을 숨겨두었나 보다고 혀를 끌끌 찼지만 아빠가 왜 이토록 산에 매달리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종종 내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빠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꽤 큰 인삼밭에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해마다 인삼도둑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셨다는 것이다. 애지중지하던 인삼을 어떤 놈이 훔쳐갔는지 걸리기만 하면 온몸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줄 것이라며 씩씩대셨다고 했다. 그날 아침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인삼 한 뿌리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꼭 한 뿌리씩만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마음먹은 할아버지는 그날 조그만 오두막에서 꼼짝없이 인삼도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이상한 짐승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던 할아버지는 무서움에 덜덜 떨면서도 인삼도둑을 잡고자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꼭꼭 숨어있었다. 그런데 그때 자박자박 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졸음이 확 깨었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사람의 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오두막에서 내려와 냅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진했다.
“잡았다 요놈!”
“악!”
깜깜한 어둠 속 사정없이 내리친 몽둥이를 온몸으로 받은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그렇게 잡고 싶었던 인삼도둑이 짐승도 아닌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이었다니.
불빛을 비춰보니 아버지는 그만 정신을 잃었고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에구머니나 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도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고 아버지를 둘러업고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자초지종을 물었다. 한참 뜸을 들인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사실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아, 그게 얼마짜린데 도대체 그동안 그걸 다 어디에 빼돌린겨? 엉?”
“아부지, 잘못했어요. 빼돌리려고 빼돌린 것은 아니고 다 좋은 곳에 썼다니까요.”
“이놈이! 바른대로 말 못해? 몽둥이찜질 한 번 더 당해야 말할 것이여?”
“아아, 아부지. 실은 저 윗동네 민자네 어무니가 많이 아프다 해서 내 몇 개 가져다준 것밖에 없다니까요.”
“뭐? 민자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양반네 가져다 바쳤다 이 말이지?”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나 보다. 사실 우리 엄마 이름이 민자고 엄마는 아빠의 첫사랑이다. 첫사랑을 위해 간 큰 도둑이 되기로 했던 어린 소년.
아빠가 요즘 산에 다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 옛날 우리 아빠가 엄마를 위해 인삼도둑이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위한 거짓말도둑이 되기로 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도둑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버지는 오늘도 함박웃음을 띠며 산으로 간다.
남자는 언젠가 여행지에서 뿌리가 얽혀있는 괴기한 나무를 떠올렸다. 그 나무는 가여울 정도로 뿌리가 훤히 드러나 있었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뿌리를 밟고 다녔다. 그렇게 뿌리를 드러내고 있는 나무를 본 뒤로는 가로수 길이나 공원에 뿌리가 드러난 나무는 슬쩍 돌아가거나 슬쩍 흙으로 덮어 주곤 했다.
남자에게 내릴만한 뿌리는 없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족보나 성씨, 가문 등의 이야기는 꽤나 먼 과거의 이야기로 여겼을 뿐 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도 이름이 있었으나 그는 이름은 그저 name. 그러니까 견출지에 붙어있는 식별 가능하기 위해 세워둔 표식 정도로만 여겼다. 이름의 뜻은 물론 성에 대한 집착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이름은 송태식이였다. 남들은 그를 송씨 혹은 태식씨라고 불렀고 남자도 그에 별다른 의의가 없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동네 고아원에서 자랐다. 원장님 말로는 잠시 위탁식으로 맡겨 둔 것이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부모는 나타나지 않았고 원장님은 그저 둥지에서 자식들을 떠나보낼 뿐이었다. 원장님이 혹시나 해서 맡겨두실 때 남겨놓은 주소와 부모님의 이름을 알려주셨지만 고아원을 나와서도 그는 부모님을 찾거나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기술을 배웠다. 홀몸이라고 해도 입에 풀칠은 해야 했기에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해가며 열심히 일을 했다. 태식은 열심히 일 한 대가로 집도 장만하고 남들처럼 윤기 좔좔 흐르는 양복도 몇 벌 장만하였다. 태식은 어렸을 때 돈을 많이 벌면 꼭 그렇게 양복을 사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런 태식도 어느덧 나이가 서른 즈음에 들어섰기에 주변에서 선자리가 많이 들어왔고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 호감을 가지며 몇 달을 만났고 드디어 여자의 집에 처음으로 인사를 가게 되는 날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양복을 하나를 꺼내 입고 머리까지 단정히 손질했다. 비록 옆에서 챙겨줄 식구는 없었지만 모자라는 것 없이 반듯하게 자란 그였다. 그런데 그것이 남자를 혼란에 빠뜨릴 첫 단추가 될 줄은 몰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송태식이라고 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꽤나 당차고 씩씩하게 첫 인사를 나눈 그는 여자의 부모님을 처음 대면했다. 부모가 없이 자란 그라 그는 집 안에 부모님이 있는 따뜻한 가정에 약간을 이질감을 느꼈으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저 처음 가보는 집이라 그런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반갑네. 여기 좀 앉게. 그래. 송태식이라고. 이름이 참 멋있군 그래. 무슨 뜻인가? 아니지 송씨면 여산 송씬가? 아님 은진 송씨? ”
남자의 등줄기에서는 돌연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뜻하지 않은 질문이었고 자신도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친구가 태식의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저 그게. 실은 어릴 때 고아원에 맡겨져 지금까지 쭉 혼자 지냈습니다. 아버님. 그래서 이름만 원장님께 들었을 뿐 가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태식은 조금 풀이 죽었다. 당차던 목소리도 어느새 말끝이 흐려졌고 처음으로 부모에 대한 생각과 말을 내뱉고 있음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가. 음. 그렇구만. 그럼 그 이름은 누가 지어주신 줄도 모르고? 혹시 원장님이라는 그 분이 그냥 지어주신 게 아닌가?”
그러자 과일을 깎고 계시던 여자의 엄마가 옆구리를 꼭 찔렀다. 한순간에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그래도 차려주신 저녁밥까지 먹고 나오는 배짱을 보였으나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그날 이후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 그리고 부모에 대한 물음표가 항상 드리워져 있었다. 몇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되뇌어 보기도 했고 그 자리에서 그냥 아무런 송씨나 댔더라면 그렇게 싸늘한 저녁식사를 하지는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매사에 당당하게 살았으며 고아원 출신이라고 해서 특별히 기가 죽은 적도 없었다. 물론 여자네 부모님의 반응도 아주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아주 잘 열어보지 않던 수첩을 하나 꺼내었다. 거기에는 옛날 고아원을 나올 때 원장님께서 적어주신 부모님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있었다. 아주 오래전 주소이기에 이사를 가셨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크게 울렁거렸다.
남자는 그날 이후 다시금 얽힌 뿌리를 훤히 내놓고 있던 나무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요즘 시에서 가장 크게 투자를 하고 잘 꾸며 놓았다고 소문난 뿌리공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그곳에서는 뿌리를 내놓고 있는 나무들이 많이 있을 것만 같았다. 주말에 뿌리공원을 찾은 그는 꽤나 넓은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나무들은 단장이 되어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넓은 공원엔 저마다 어떤 비석이 있었다. 족보박물관 앞에 선 순간 남자는 문득 여자 친구 댁에 인사갔을 때를 떠올렸다. 송태식, 자신의 이름을 되뇌며 말이다.
그리고는 낡은 수첩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송현식. 남자는 불현 듯 자신도 뿌리를 내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뿌리를 내릴 곳을 찾았다는 중얼거림과 함께.
다섯 살 때 무렵이다. 나는 동네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무서움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차마 ‘엄마’를 목 놓아 부르지도 못했다. 그저 나중에서야 엄마를 보고 난 뒤 안도감에 참았던 설움과 공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뿐이었다. 엄마는 내 엉덩이를 팡팡 때리면서 엄마도 놀람과 안도감을 내려 보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아직 사그라지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다. 그럴 때면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 싱싱한 딸기를 생크림에 듬뿍 찍어 주셨다. 그럼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눈물을 훔치고 딸기 한 접시를 뚝딱하고 비웠다.
어려서의 기억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담겨있어서 일까, 나는 여전히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찰 때면 딸기를 먹었다. 수능시험을 칠 때. 처음 남자친구와 첫 키스를 하던 날.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면접을 볼 때. 나는 마음속으로 딸기를 되뇌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입안에 침이 고였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주말이 되어서야 집에 내려갔다. 자취 생활이 어느덧 몸에 익숙해지자 주말에만 가던 것도 줄어들어 한 달에 한번 혹은 두 달에 한번 꼴로 집에 내려갔다. 엄마가 항상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집에 내려올 것을 당부했지만 알겠다고 한 뒤 당일 일이 생겨서 못 간다는 식으로 한 달 그리도 두 달을 보냈다. 내가 집으로 곧장 달려간 것은 아빠의 전화를 받은 후였다.
‘네 엄마 지금 쓰러졌어. 여기 병원이야. 얼른 집으로 내려와.’ 내가 아무리 집에 소홀하고 엄마에게 소홀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냐며 꿈속을 헤매고 있는 엄마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간호사는 환자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나와 엄마를 분리시켰고 나는 마구잡이로 엄마를 흔들어댔다. 결국 면회시간도 다 못 채우고 병실 밖으로 쫓겨났다. 담당 의사는 엄마가 지금 혼수상태라고 했다. 언제 정신이 돌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혼수상태라고 하면 한 달 혹은 일 년 그것도 아니면 기약할 수 없는 언젠가를 바라면서 잠들어있는 상태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병원 복도 끝에 그만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큰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가 왜? 아니. 나에게 왜 이런 일이.
간호사에게 사정사정하여 잠깐 동안 얼굴만 보고 나오겠다고 빌었다. 간호사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그녀도 사람인지라 아주 잠깐동안만이라는 전제하에 허락을 해주었다.
“엄마. 내 말 들리지? 엄마 지금 자고 있는 거니까 내 말 다 알아 듣고 있는 거지? 엄마 그 동안 많이 힘들었어? 왜 이렇게 갑자기 쉬고 싶어진 거야? 응? 엄마, 한숨 푹 자고 나면 이제 지겨워서라도 일어날 거지? 일어나서 나랑 같이 쇼핑도 하고 요리도 하고……. 그래! 엄마랑 내가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에 듬뿍 찍어 먹어야지. 응?”
엄마, 제발 눈 좀 떠봐, 내말 안 들려?
엄마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된지도 벌써 한 해가 흘렀다. 주위에서는 이제 그만 엄마를 보내주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 귀에 잠잠히 들려왔지만 나는 믿는다. 그저 엄마는 꿈속에서 너무 좋은 일들이 많아서 아직 깨고 싶지 않은 걸 거라고. 내게 줄 딸기를 모조리 따오느라 늦는 걸 거라고.
병실에 들어서기 전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다. 엄마 손이 아직 따뜻하잖아. 그걸로 된 거 아니야? 아주 조용히 엄마에게 집중하면 엄마가 가끔 코를 고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니 나는 아직 엄마를 보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열매가 익을 무렵이 아니라는 것에 희망을 건다. 엄마는 딸기가 빨갛게 열매를 맺을 때면 분명 눈을 뜨실 것이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나를 달래려 따뜻한 생크림을 듬뿍 찍은 딸기를 건네며 ‘많이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라며 그동안의 설움을 다독여 줄 것이다.
차마 그리움을 말로 다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의례적으로 어떤 장소를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서 보고 싶은 사람의 흔적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음성을 떠올리며 추억의 끝을 걸어보곤 한다. 항상 후회는 무언가 지나고 난 후에 스며드는 것이라 했던가. 준서는 문득 부모님을 만나러 그곳에 간다.
그곳은 늘 조용했다. 먼발치에서 동그랗고 작은 무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약간 허무하기도 했다. 두 분이 나란히 사이좋게 누워계시는 곳이지만 준서의 눈에는 잔디가 무성한 작은 언덕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맨손으로 무덤가에 자란 잡초를 몇 개 뜯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저 준서 왔어요.”
혼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색한 것인지 듣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서인지 준서는 퍽 어색해했다. 마치 연극무대에서 독백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준서는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부모님과 제법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래서일까 준서는 꽤 긴 방황을 했고 준서의 부모님도 많이 지쳐있었다. 외아들이라 오냐오냐 곱게만 자랐을 것 같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게 준서의 부모님은 꽤 엄하셨다.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방황이나 조금의 일탈도 용납하지 않으셨고 그럴수록 준서는 더 엇나가기만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과 어머니의 방관은 준서를 더욱 힘들게 했다.
준서는 차라리 이럴 거면 부모님이 없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 몇 년 후 뼈저리게 아픈 말로 남을 줄은 준서도 몰랐을 것이다.
종이컵에 소주를 조금 따르고 절을 올렸다.
“저 곧 결혼해요. 듣고 계시죠?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잘해주고 마음도 넓어요. 저 이런 유별난 성격 다 받아주는 사람이면 어머니 아버지도 이 여자 인정해주실 거라 믿어요. 부모님 없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문득 서글퍼져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여기 누워계시니까 정말이지 그 때는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태어나면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전 아버지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늘 어머니를 외롭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옆에 나란히 누워 손 잡아주고 계시죠?”
준서는 부모님이 가지런히 누워계신 이곳을 자주 찾지 않았었다. 옛날에는 삼년상이라고 해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고자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고 호랑이한테 잡혀가서도 묘성을 쌓기 전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던데 준서는 어쩐지 이곳이 낯설었다.
이렇게 부모님께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새삼 놀라울 일이었다.
곧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될 준비를 해서일까 준서는 새삼 부모님의 곁이 그리웠다. 호통을 쳐도 쓴 소리를 해도 좋으니 곁에만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
산소에 오기 전 준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올리는 편지를 썼다. 어버이날에도 써보지 않았던 서툰 편지로 준서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산소 앞에 조심히 편지를 놓아두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편지였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진실 된 편지였다.
편지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왠지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낯설 것만 같았던 이 길이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이곳을 찾고 부모님을 뵐 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후회라는 것은 언제나 지나고 난 다음에야 든다. 내가 그렇고 다른 사람이 그렇듯 언제나 동일하게.
“따님이 어머님을 많이 닮았어요.”
미용사가 엄마의 머리를 빗으로 다듬으면서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지금껏 엄마를 봐온 나보다 엄마를 처음 본 미용사가 더욱 살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는 참 오랜만에 미용실을 찾았다.
“우선 희끗한 저 흰머리 좀 염색해주시고 머리는 가볍게 파마해주세요.”
엄마는 온순한 양처럼 가만히 앉아있다. 바로 앞에 마주하고 있는 큰 거울이 어색해서 인지 자꾸만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엄마, 고개 좀 들어봐. 그래야 머리가 예쁘게 되고 있는지 알지.”
내 말에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어 거울을 본다. 여전히 어색한 표정은 남아있지만 그런 어색함이 낯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따님이랑 이렇게 시내 나오시니 좋으시죠?”
“네”
엄마의 단답형 대답에도 미용사는 여전히 수다스럽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아무래도 직업병이 아닌가 싶었다.
“점심은 맛있는 거 드셨어요? 따님한테 오늘은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세요. 예를 들면 스파게티라던지 경양식도 좋고요.”
“네”
미용사는 친절히 메뉴까지 들어주었지만 여전히 엄마는 무뚝뚝했다. 미용사도 조금은 지쳤는지 머리손질에 신경을 두었다. 두어 시간 지나자 엄마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희끗했던 흰머리는 단정한 자연갈색으로 물들었고 헝클어져있던 머리칼은 가벼운 펌으로 탄력이 생겼다.
“이야. 누구 엄마인지 정말 예쁜데?”
엄마는 피식 웃었다. 엄마도 마음에 드신 듯 웃음을 보이셨다.
엄마는 얼마 전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다. 암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자궁을 들어낸다는 것에 엄마는 여자로서의 삶이 끝난 것처럼 많이 우울해 하셨다. 수술은 잘 되었고 건강관리만 잘 하시면 일상생활에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했다.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한동안 죽만 먹어서 좀 질렸을 텐데. 엄마가 좋아하는~”
순간 엄마가 좋아하는 하고 말문이 막혔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자취집에서 집에 가는 날이면 우리 딸 좋아하는 순두부다 갈비찜이다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계셨는데 나는 이렇게 많은 식당이 있음에도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하나가 떠오르지 않아 엄마 손을 잡고 계속 걷기만 하고 있다.
“칼국수 먹자. 칼칼하고 시원한 게 먹고 싶네.”
엄마는 내가 당황한 것을 알아챘는지 칼국수를 드시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입맛이 없다고 하는 날이면 국수를 말아 드셨던 기억이 났다.
등촌동 칼국수는 뽀얀 국물에 바지락이 들어가 있는 모양이 아니었다. 버섯 매운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얼큰한 국물에 버섯과 미나리 그리고 칼국수 면을 넣어 칼칼하게 먹는 방식이었다. 한여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먹다보면 땀이 나면서 몸에 원기가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음, 국물 시원하다. 엄마 여기 와 본적 있어?”
“응, 저번에 네 아빠랑. 국물이 칼칼하고 시원한 게 좋더라고.”
“아빠랑? 언제?”
“엄마 수술하기 전에. 여기에서 답답하던 속 다 풀고 가라고.”
무뚝뚝하던 아빠는 수술 전에 엄마를 모시고 나온 적이 있으셨나보다. 엄마의 갑작스런 수술에 아빠도 적잖이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평소 말 한마디 선물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으셨던 아빠가 먼저 외식을 하자고 했다는 것에 엄마도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느끼셨으리라 생각한다.
국수를 다 건져먹고 갖은 채소와 계란까지 풀어 볶음밥까지 싹 비우고 나서 음식점을 나왔다.
나는 엄마에게 뭐 해보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엄마는 내손이랑 엄마손을 비교해보더니 “나도 이런 거 해보고 싶다. 이걸 뭐라 하더라? 네일아트?” 엄마는 생각도 못한 네일아트를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 엄마. 이제 엄마 해보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그렇게 사세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엄마와 걸어가는 데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헴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마을의 꼬마들이 빙 둘러앉았습니다. 올해 102세로 마을의 가장 장수하신 에헴 할아버지는 늘 아이들을 보면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시는 할아버지라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부를 때 에헴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하지요.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약수터 정자에서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실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이야기가 궁금하여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 몸을 할아버지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습니다.
“에헴! 여기 약수터 보이지? 오늘은 이 약수터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이 약수터는 아주 오래되었지. 아마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일게다. 이 약수는 지금보다 더 신비로운 물이었지. 바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마셔도 그 물이 마르지 않았단다. 그리고 이 물은 톡 쏘는 맛과 신비로운 효능이 있어 배가 아프고 몸이 아픈 환자가 먹으면 힘이 솟으며 병이 낫는다고 알려졌었지. 그래서 우리 마을로 이 약수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해가 뉘엿뉘엿 질 때였지. 수상한 차림의 남자가 큰 배낭을 메고 우리 마을로 들어왔어. 그리고는 큰 통에 물을 마구잡이로 퍼 날랐지. 이 특별한 약수를 빼돌리려고 했던 모양이야. 그렇게 많은 물을 퍼 나른 남자가 다녀가자 아무리 마셔도 마르지 않던 약수터의 약수는 점점 말라가게 되었어. 물이 점점 말라가는 것을 안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더 많은 물을 차지하려고 싸우기 시작했단다.
그렇게 사이가 좋던 마을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거짓말을 하고 심할 때는 물을 빼앗기도 하였지. 쯧쯧쯧”“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에헴. 끝까지 들어 보아라. 그렇게 약수 때문에 싸움이 계속되자 보다 못한 마을의 산신령이 물의 맛과 효능을 싹 없애버렸단다. 그래서 아무리 물을 먹어도 병이 낫는 사람도 없고 물도 점점 흘러나오지 않았지. 사람들은 또다시 이게 다 다른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라고 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생각을 하지 않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한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지게 되었어. 사람들은 그제야 약수 때문에 싸운 것을 후회하고 반성했지. 그러면서 자신이 예전에 받아두고 얼마 남지 않은 약수를 한 바가지씩 할아버지네 집으로 가져왔어.
그렇게 한 바가지씩 모은 약수를 가지고 몸에 좋은 토종닭을 잡아 닭백숙을 푹 고아 할아버지께 드렸지. 그러자 할아버지의 병은 씻은 듯이 낫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건강해지셔서 매우 기뻐했단다.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한 바가지씩 약수를 모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기특하게 여긴 산신령을 달기약수터의 효능을 다시 되살리고 그 옆에 또 다른 약수터를 만들어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기를 바랐단다.”
에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한 명씩 약수를 마셔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너나 할 것 없이 팔을 들어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고 하였지요.
아이들은 에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물을 마시니 마을의 약수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났지요. 그런데 이야기 속 닭백숙을 먹고 건강을 되찾은 할아버지가 에헴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 채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야, 서울은 역시 죽이네. 사람들 때깔부터가 다르다. 우리 동네랑은 비교도 안 된다.”
서울로 갓 상경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끼는 서울의 첫인상은 그랬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고 고층 건물들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아찔한 높이를 자랑했다. 고층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저기를 올라가려면 며칠 전에 올라가야 하나? 라는 촌티 팍팍 나는 생각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 당시에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생소할 시기였으니 그럴 만도했다.
내가 서울이라는 곳 그것도 영등포구라는 이 네 글자를 기억하는 건 단 하나였다. 다름 아닌 ‘라디오’ 그때의 청춘이라면 누구나 문세오빠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매일 같은 시간이면 지지직거리며 주파수를 잡았고 스탠딩 불빛 하나만 켜놓은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매일 밤 10시 5분부터 밤 12시까지 문세오빠의 달콤한 목소리와 각각의 사연들 그리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신청곡을 기다리는 재미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사를 받아 적느라 팔이 아프도록 글씨를 끼적인 적도 있고 문세오빠가 읽어주는 사연에 눈물콧물을 쏟기도 했다.
라디오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항상 라디오에 신청곡이나 사연을 보내라며 말하던 곳이 영등포구 여의도동 사서함…… 이렇게 시작했다.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서울 하면 내가 늘 들어오던 영등포구 여의도동밖에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내게 영등포구 여의도동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게 올라온 서울은 역시나 특별했다. 사실 정신없는 도로와 사람들 때문에 별 다를 것 없는 공간이 더욱 특별해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야야! 저 봐라. 저기 진짜 높은 건물 있다. 저게 다 몇 층일까?”
“야, 니 저거 모르나? 63빌딩!! 63빌딩이니까 63층이지.”
“니는 어떻게 알았는데? 그나저나 63층? 이야. 저기 올라가면 서울 시내 다 보이겠다. 그렇지?”
“올라가볼래? 여기까지 왔는데 63빌딩도 안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욕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시간을 보낸 채 도착한 곳은 63빌딩의 전망대였다.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꿈에 그리던 서울 길. 그리고 그 속에 속해있는 나 자신이 신기한 순간이었다. 서울이라는 단어가 마치 다른 나라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심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야! 저기 저 방송국! 저기에서 문세오빠 라디오 하잖아. 저기서 한참 있다 보면 오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바보야, 지금 아직 오후 4시도 안됐는데 무슨, 오빠 라디오 밤에 하는 거 몰라?”
“아, 그렇지. 그럼 우리 오늘 우리 여기 왔었다고 라디오에 사연 보내볼까? 그럼 당첨돼서 문세오빠가 우리 이름도 불러줄걸?”
63빌딩에서 내려와 한참을 문방구를 찾아 헤맸다. 우리 동네는 그냥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문방구가 하나쯤은 있었는데 여기는 그 흔한 문방구도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서울이 문방구 하나 없나 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문방구를 물어보니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니 문구와 여자아들이 좋아할 만한 머리핀, 작은 장난감까지 함께 팔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한참을 구경하다 예쁜 엽서 하나를 골라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이렇게 시작한 글에 우리는 참 손글씨로 어여쁘게 엽서를 꾸몄다. 긴장감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글이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드디어 실려 가는 구나 생각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두 손을 모아 엽서를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었다. 언제 방송이 될지도 모른 채 혹여 채택이 안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 걱정도 되었다.
앗, 10시다! 별이 빛나는 밤에 할 시간이야.
별이 빛나는 밤에. 문세오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이불속에 쏙 들어가 라디오를 한 참 듣는데 익숙한 이름과 글귀가 흘러나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그렇게 우리가 보낸 사연이 채택되어 라디오를 타고 흘렀다.
처음 영등포구를 찾던 날, 63빌딩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본 것, 라디오에 사연을 쓰게 된 이야기까지 라디오는 참 신기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타고 흘렀다.
라디오에 온 감성을 쏟았고 학창시절이 라디오로 가득 차 있던 시기. 그 속에는 가 본적이 있어도 가보고 싶은 영등포구 여의도동이 있다.
오늘은 어떤 사연이 이 주소로 흐르게 될까.
아이를 잃은 지 벌써 닷새가 조금 넘었다. 집 앞 골목에서 놀던 아이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달도 기울어진 밤. 어스름히 비추는 가로등이 자꾸만 깜박거린다.
아이를 찾으려 경찰, 미아신고센터 등 발을 넓혀 수소문해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실마리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유괴라면 협박을 하는 전화 한통쯤은 걸려왔을 법한데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다. 그렇다면 아이의 실종일까. 일곱 살 난 아이가 혼자서 길을 잃었다면 누군가 보호를 하거나 신고를 했을 텐데 동네에 아이의 흔적은 토막 난 시간처럼 깨끗했다.
“생김새가 유사한 아이를 목격했다는 제보전화입니다. 사례금을 먼저 묻는 걸 보니 약간 의심스럽긴 한데 그래도 일단 만나보심이…….”
사람들은 남들의 아픔에 치명적인 순간을 노리곤 한다. 장난전화라는 무책임한 단어에 피가 마르고 심장이 덜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돈을 노린 하이에나들처럼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는다는 기분이 이럴까. 아내는 자신이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반 실성을 하며 통공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결국 자리에 누웠다. 아이의 이름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경찰은 아직 일주일을 넘기지 않은 상황이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노력을 해보자고 했다. 물론 그들도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는 듯했다.
아이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단순히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보호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것일까. 그 다음의 최악의 상황은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왜 불길한 상황에서의 생각은 자꾸만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드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아빠’하며 찾을 것을 생각하니 밤이 깊어가도 좀처럼 자리에 누울 수 없었다. 아이가 어디에서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부모가 되어서 어떻게 발 뻗고 잠들 수 있을까.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경찰에서도 우리 쪽에서도 그렇게 발 빠르게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이제는 조금 느슨해졌다.
따르르르르릉. 전화 한 통이 울렸다.
화순의 한 절이라고 했다. 우연히 아이를 찾는 전단지를 보았는데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아이와 비슷한 것 같아 전화를 했다고 했다. 몇 차례 장난전화를 받았지만 매번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오면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런데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곳이 절이라니. 장난일리는 없겠다고 생각이 되었지만 만약 정말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그곳에서 보호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전화를 건 사람의 목소리에서는 장난기라고는 없었고 꽤나 진실했다. 우선 아이는 잘 있다는 말을 먼저 하는 걸 보니 안심이었다. 문제는 그곳까지 아이가 어떻게 갔을까이다. 차로 족히 10Km는 가야할 거리이다.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해도 아이혼자 쉽지 않은 거리인데.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임에도 자꾸만 의심이 가슴 속에서 콕콕 솟아올랐다.
급하게 차를 세워두니 저 멀리서 아이가 뛰어왔다. 아이의 상태는 괜찮은 듯 했다. 눈으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니 5일간의 마음고생이 사라지니 급하게 피곤이 몰려왔다. 아이를 어떻게 보호하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듣기위해 스님과 잠시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많이 놀라셨지요? 빨리 연락을 드리지 못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이렇게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아이도 잘 보살펴주시고.”
스님은 천천히 칠성바위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며칠 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여 몸이 천근만근이었으나 아이를 찾았다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이것이 칠성바위입니다. 언뜻 보면 그냥 7개의 원반석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북두칠성이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아이를 어떻게 보호하게 되었는지를 묻었는데 스님은 대뜸 북두칠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렇다고 스님의 말을 자를 수 없었기에 말없이 예에. 하고 듣고만 있었다.
“북두칠성은 북극성과 같이 나그네의 길잡이가 되어준다지 않습니까. 아이가 저를 찾아오게 된 것도 다 그런 이치이지요.”
스님은 자꾸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간절한 마음이 북두칠성의 밝은 빛을 받아 아이를 이쪽으로 움직이게 하였을까.
자꾸만 졸음이 쏟아져 스님의 이야기가 희미해진다. 이제 겨우 아이를 어떻게 발견하였는지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이 희미해지고 몽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