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또 이야기 해주세요! 네?
손주 녀석이 주위를 맴맴 돌며 자꾸만 성가시게 군다.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성화다. 녀석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늙은이의 소일거리가 되어버렸다. 딸애가 손주를 맡기고 외출을 했을 때 하도 심심해하기에 옛날이야기를 한 번 해준 것이 시작이었다.
“동화책보다 할머니가 이야기 해주는 게 훨씬 재미있단 말이야.”
“할머니 귀찮으시니까 책을 보든가 비디오 봐. 네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빌려왔어.”
“싫어. 싫어, 할머니 무릎에 누워서 이야기 들을 거야. 메롱~”
손주 녀석이 내 무릎위에 자리를 잡고 눕더니 기어이 눈을 감고 이야기를 기다린다. 하기야 이제 좀 더 크면 이런 어리광도 못 보겠다 싶어 못이기는 척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옛날 옛날에, 아주 탐스러운 사과나무 한그루가 있었어. 사과나무는 마을 한 가운데 우물 옆에 있었지. 처음에 마을사람들은 사과나무에 탐스러운 사과가 열리면 우물물처럼 공동으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어. 남는 것은 따다가 마을 공동 창고에 보관하면서 먹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마을에 큰 문제가 없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마을사람들의 탐욕이었단다.
언젠가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욕심이 자라났고 옆 동네 김씨가 자기네보다 더 많은 사과를 가져가는 것 같았고 옆 집 박씨가 더 탐스럽고 빛깔 좋은 사과를 먼저 골라가는 것 같이 느꼈던 거야. 마을 사람들 모두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탐스러운 사과나무가 자기네 소유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요? 막 싸우고 그랬어요?”
“원래 사람의 마음에 욕심이 들어차는 순간이 문제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던 김씨가 사과나무 근처로 가서 마을사람들 몰래 탐스러운 사과를 따기 시작했단다. 처음에는 한 다섯 개만 몰래 가지고 왔지. 그런데 도둑질이라는 게 습관이 되면 무서운 법이지. 하루 이틀이 지나고나니 김씨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열 개, 스무 개씩 몰래 따오기 시작했단다. 원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지.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마을 회의 때 누군가가 사과나무의 사과가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김씨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화를 내면서 그런 양심 없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걸리면 가만두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 마을사람들은 김씨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면서 사과도둑을 잡아야 한다고 했단다.
그래서 김씨는 머리를 썼단다. 자신이 도둑을 잡아오겠다고 큰 소리를 친 거지. 도둑은 아무래도 새벽녘에 나타날 테니 자신이 숨어 있다가 도둑을 잡겠다고 한 거야. 그리고는 날이 밝으면 도둑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속셈이었단다.
날은 어두워졌고 김씨는 우물 옆에 숨어있었단다. 그리고는 잽싸게 사과를 땄지. 그런데 그 때였어. 마을 사람 중에서도 유독 김씨를 눈여겨 본 박씨였지. 박씨는 ‘도둑이다. 사과 도둑이 나타났다’라고 소리를 치며 긴 몽둥이를 휘두르며 김씨에게로 달려왔단다. 놀란 김씨는 그만 휘청하여 옆에 있던 우물에 빠지고 말았어.”
“헉, 그래서 김씨는 어떻게 되었어요? 우물에 빠져서 죽었어요?”
“뒷이야기가 꽤나 궁금한 모양이로구나. 우물에 빠진 김씨는 박씨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면서 그동안 자신이 사과를 훔쳤다고 솔직하게 말을 했단다. 박씨는 김씨를 용서하고 우물에서 꺼내어 주었지. 그런데 박씨가 우물에서 김씨를 구해주자 마자 김씨의 태도가 별안간 달라졌단다. 목숨을 구해준 박씨에게 오늘 일을 마을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박씨를 협박했지. 박씨는 무서운 마음에 알겠다고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단다. 그런데 마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단다. 새벽녘이 되면 우물에서 김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어.
자기가 사과도둑이었고 목숨만 살려준다면 마을사람들에게 잘못을 빌겠다고 김씨가 우물에 빠졌을 때 말한 내용이었지.
우물에서 들려온 소리 때문에 김씨의 잘못이 온 동네방네 소문이 났고 김씨는 진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잘못을 뉘우쳤고 박씨에게도 사과를 했단다.”
“이야. 역시 할머니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어요! 다음에도 또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셔야 해요!”
이번 이야기도 꽤나 재미있던 모양이다. 다음 이야기는 무엇을 들려주어야 하나 오늘도 행복한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다.
“아, 또 포장마차 가려는 거잖아. 난 싫다고! 레스토랑 가자니까?”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다니는 딸이 오랜만에 집에 왔다. 귀하신 얼굴을 영접했으니, 마땅한 대접을 해 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아빠랑 단둘이 외식 한 번 하자며 대뜸 손을 잡아끌었는데, 녀석이 예전 같지가 않다.
아내가 집을 나가 버린 지도 십여 년이 흘렀다. 집을 나갔을 때에 바로 찾으러 나갔다면 세 식구 오순도순 사는 집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자존심 때문에 잡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도 한으로 남아 있었다.
후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나는 매일 술을 마셨고,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딸애가 내 뒷바라지를 해 주곤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그것이 죄스러워 미선이를 공주님처럼 오냐오냐 해 가며 키웠다. 엄격한 아빠 노릇을 하기에는 이미 늦은 일이었지만, 이제는 딸애가 내 장단에 맞춰주질 않으니 이건 또 서럽기도 하다.
“우리 딸도 다 컸으니 이제 아빠랑 술 한 잔 기울일 수도 있는 거지, 뭐. 너도 포장마차 떡볶이랑 국수 좋아하잖아.”
일부러 풀이 죽은 표정을 짓자, 미선이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내가 어디 가서 말은 안 하지만, 우리 미선이는 이렇게 속이 깊고 정이 많은 것이 제일 큰 장점이다.
“아니, 내 말은……. 아빠 좋아하는 것도 많이 먹었으니까 이제 내가 좋아하는 것도 좀 먹으면 안 되냐고. 나 피자도 좋아하고 해물도 좋아하는데, 아빤 내가 집에 오면 맨날 분식만 먹이려고 하잖아.”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이건 내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었다. 하지만 레스토랑 음식은 영 내 입맛에 맞지를 않으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저녁때를 완전히 넘겨 버릴 것 같았다. 미선이는 아까부터 뭘 하는지 제 방에서 나오질 않고,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거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사과를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넉살좋게 다시 한 번 말을 붙여볼까 고민하고 있던 그 때, 미선이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아빠, 찾았어! 가자!”
무어라 대답을 할 틈도 없이 미선이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섰다. 미선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걷고 있는데, 문득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 생각났다.
미선이가 정해 준 통금 시간은 아홉 시. 그 어린 것이, 아홉 시가 넘으면 나를 찾아 온 동네 포장마차를 다 돌아다녔다. 어린 애 혼자 술파는 곳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처음에는 덮어두고 혼을 내던 동네 어른들이 언젠가부터 내가 있는 곳을 넌지시 일러 주었다고 한다. 예쁜 딸을 두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처음 보는 어르신에게 호통을 들은 기억도 있는 것을 보니, 동네에서 꽤 유명해졌을 정도였나 보다.
동네 포장마차 한 구석에서 만취해 잠들어 있는 나를 찾아내면, 미선이는 항상 ‘우리 아빠, 괜찮다. 괜찮다.’하고 말하며 웃어른처럼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내 주머니를 뒤져 술값을 계산하고 고사리 손으로 나를 잡아끌어 집으로 데려왔었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어린 딸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정말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미선이와 함께 도착한 곳은 허름한 파전 집이었다.
“포장마차가 싫다더니, 파전이 먹고 싶어서 그랬어?”
머쓱해진 내가 말을 건네자. 미선이가 웃는다. 아빠가 파스타니 피자니 하는 것들 싫어하는 거 다 안다고. 우리 둘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해서 찾아봤더니, 동래파전이라는 게 있었단다.
“봐봐. 파전이라도 해물 잔뜩 들어가고 두꺼운 게 꼭 시카고 피자 같잖아?”
내가 시카고 피자가 뭔지 알 턱이 있나. 파전 한 입에 막걸리 한 대접을 기분 좋게 원 샷 하는 딸을 보니 왠지 콧등이 짠해져 왔다. 아빠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오늘은 꼭 우리 딸이 만취해버렸으면 좋겠다. 의젓한 우리 딸은 취해서 미안하다며 민망해하겠지만, 나는 괜찮다며 미선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이다. 그리고는 손을 잡고, 아니 등에 꼭 업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엄마한테는 짭조름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땀 냄새도 아니고 엄마 한테서만 풍기는 엄마냄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슈퍼맘이나 워킹맘이라는 단어가 선풍적으로 쓰인 때가 있었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엄마들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슈퍼우먼을 뜻하는 말이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우리 엄마가 슈퍼맘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로 자식들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슈퍼맘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슈퍼맘의 길에 접어들었겠지만 우리 엄마는 등 떠밀려 슈퍼맘이 되어야했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공부시키려고 엄마는 참 열심히 일했다.
처음부터 식당을 개업한 것은 아니었다. 동네의 조금 큰 한식당에서 주방 설거지를 하고 홀 서빙 일부터 시작했다. 식당이 문을 여는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식당이 문을 닫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엄마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손은 항상 부르트고 거칠었다. 사실 엄마와 같이 살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학교에 가려고 일어나면 엄마는 이미 식당에 가신 후라 아침상만 덩그러니 있었고 밤에는 엄마를 기다리다 먼저 잠든 적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해를 더 식당에서 일을 한 엄마는 이듬해 봄에 작은 한식당을 열었다. 식당에서 음식판매뿐 아니라 반찬을 함께 팔기도 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닮아 요리솜씨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음식에 있어서 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며 소금을 가장 깐깐하게 생각했다. 엄마는 메인 요리와 함께 나가는 밑반찬들을 직접 만들었으며 식당을 찾는 사람들은 밑반찬이 깔끔하고 맛있다며 종종 구매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계속 일을 고집하는 엄마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사람이 하던 일을 안 하고 집안에만 있으면 빨리 늙는 거라고 했다. 하긴 지금까지 엄마의 삶에는 조금의 쉼도 없었다. 늘 바쁘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던 삶이라 여유라는 쉼이 엄마에겐 어떤 것보다 낯설기도 할 것이다. 엄마의 삶을 봐왔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누가 짠돌이 아지매 아니랄까봐 자식농사 풍년인데 뭣하러 지금까지 고생이냐고 했고, 엄마는 “짠돌이 어디 가나요. 그러지 말고 계모임 같은 거 있으면 다른 식당 가지 말고 우리 식당으로 와요”하며 웃음만 지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짠돌이 아지매라 불렀다. 엄마와 나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아마 짠돌이라는 별명에서 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용돈을 참 적게 주셨다. 그래서 돈을 아끼고 아껴야만 겨우 학교 준비물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100원 200원짜리 불량식품도 내겐 사치였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고등학교 때까지 내 별명은 짠돌이였다. 물론 지금도 짠돌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있다. 지금은 여유 있는 생활을 할 만큼 벌이가 괜찮아 졌지만 여전히 돈을 허투루 쓴 적이 없다. 아마 나도 나이가 들면 엄마처럼 짠돌이 아지매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침부터 엄마가 분주한 걸 보니 반찬으로 나갈 배추겉절이와 오이소박이, 각종 나물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가끔 회사에 월차를 내는 날이면 엄마를 도와 반찬을 만들며 식당일을 돕는다. 엄마는 반찬을 만들 때에도 항상 ‘소금’의 중요성을 연설했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만큼 음식의 풍미를 돋우어주는 소금의 선택이 맛을 좌우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신안에서도 가장 좋은 천일염만을 고집했다. 나는 이런 좋은 소금 쓴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고 했지만 엄마는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입맛은 귀신보다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 간 하나에 발길이 이어지고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칭찬과 쓴 소리가 좌우되는 것이라고 했다. 질 낮은 소금을 쓰면 음식이 텁텁하고 쓴 맛이 감돌며 질 좋은 천일염을 쓰면 깔끔하고 풍미 있는 깊은 맛을 낸다고 했다.
엄마의 고집은 소금만큼이나 짭짤했다. 질 좋은 소금을 써서 일까 사람들은 엄마의 음식솜씨를 칭찬했고 ‘짠돌이 아지매’ 식당을 찾는 사람들도 부쩍 많아졌다.
엄마가 일을 갔다 돌아오면 엄마 특유의 짙은 냄새가 났다. 엄마에게 풍기는 짭조름한 냄새도 질 좋은 천일염처럼 기분 좋은 엄마 고유의 냄새로 기억될 것이다.
작은 원을 그려보았다. 손끝을 따라서 동그란 원이 그려졌다. 그리고는 나무를 향해 말했다.
“나는 일곱 살이야. 너는? 너는 나이가 많으니?”
그리고는 밟아도 소리 나지 않고 발이 푹푹 빠지는 아주 고운 모래에 다시 동그마니 원을 그렸다. 손끝을 따라 그려지는 원은 모래에 나이테가 그려지는 듯 동그랗게 또 동그랗게 그려져 나갔다. 여러 개의 원이 모이니 톱니바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린근원의 손끝에 흐르는 동심원은 점점 더 퍼져나갔다.
근원은 등산화 끈을 조금 당겼다. 오늘은 등산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A, B팀으로 나뉘어 각자 배정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근원은 A팀에 배정되었고 아침으로는 김밥과 음료수, 물이 주어졌다. 아주머니들은 삼삼오오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로 버스를 가득 메웠고 근원은 홀로 창가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데 오늘의 사회자로 나선 남자가 마이크를 잡으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근원은 목적지까지 조용히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대다수의 입장에 반기를 들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경을 다른 데로 쏟기 위해 근원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미리 챙겨온 시집을 꺼내들었다. 친구 따라 얼떨결에 한두 번쯤 나가본 시사랑 동호회에서 추천받아 사게 된 시집이었다. 시를 잘 모르는 그였기에 어쩌면 시를 더욱 잘 읽고 느낄 수 있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노송’이라는 제목의 시가 등장했다. 8줄 내외로 간략하게 쓰인 시에는 늙은 소나무에 대한 작가의 영감이 손끝을 타고 강렬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읽기 어려운 점이 없었음으로 근원은 비교적 잘 쓴 시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한번 읽고 밀려오는 졸음에 정신을 내어주고 목적지까지 다다랐을 그였지만 근원은 자신이 시를 쓰는 작가라면 늙은 소나무를 가지고 어떤 시를 써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읽었던 시가 머릿속에 맴돌아 근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근원은 머리를 흔들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몸짓이었다.
‘늙은 소나무라. 소나무는 원래 좀 늙지 않았나? 어디를 돌아다녀보아도 1,2년 된 소나무는 거의 못 본 것 같은데. 한 400년쯤은 되어야 하지 않나?’
근원은 속으로 속삭였다. 속으로 말하는 것이라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근원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도착 10분 전입니다. 오늘 저희가 가기로 한 곳은 산이 아니라 트레킹 코스이기 때문에 크게 힘든 점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므로 단단히 준비하시고 내리셔서 일사분란하게 모여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소나무가 정말 예술입니다.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하니까 그곳에서 사진 찍으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제 차가 멈춰서면 내리세요.”
사회를 맡았던 남자는 도착 10분전을 알리며 깔끔하게 정리멘트를 보냈다. 근원도 잠시 생각을 접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모처럼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따라 물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였다. 사회자 남자의 말에 의하면 오백년 된 소나무가 있다고 했다. 남자는 차안에서 읽은 시를 떠올렸다.
날이 맑아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 동호회 사람을 제외하고도 많은 인파가 색색 깔의 등산복을 입고 소나무 숲길을 걷기위해 몸을 풀었다. 간단히 준비운동을 한 뒤 각각 흩어져 걷기 시작했다. 송림이 우거진 숲에 다다르자 길게 뻗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그 자태를 뽐내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고 근원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소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오백년 된 늙은 소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노송이라’
근원은 머릿속에 시를 그려나갔다.
늙은 소나무
너는 말없이 늙어있구나
너의 늙음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너의 몸에 동그라미를 그려나갔구나
지나간 세월만큼 너는 늙어있구나
굵은 기둥은 단단하고
네 몸뚱이에서 풍겨오는 짙은 냄새가
너의 늙음을 대신하는 구나
근원은 다시 한 번 흙바닥에 동그마니 원을 그려보았다. 어린 근원이 모래바닥에 작은 동심원을 그려 넣듯이 늙은 소나무 앞에서 동심원을 그려나갔다.
오늘로 단종께서 유배령을 받은 지 꼬박 닷새만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 겨우 주천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단종께서는 심신이 매우 지친상태로 보여 걱정이 됐다. 겨우 12살인 단종. 역사는 어린나이에 숙부에게 왕의 자리를 내어주고 유배령을 받은 비운의 왕으로 기억할 것이다.
단종께서는 많이 지치셨는지 입이 바싹 말라있었다. 마을을 둘러보기도 전에 물 한 모금을 청할 곳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우물가를 발견하고 단종은 물 한 모금을 겨우 마시며 지친 몸을 풀어야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유배 행렬은 다시 이어졌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험준한 산을 올라야 했다. 행렬을 뒤따르는 우리는 물론 단종께서도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으나 단종께서는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세상에 어떤 왕이 자신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며 흙바닥에 큰절을 올릴 수 있을까. 단종은 그저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는 것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마침내 낡은 나룻배를 타고 외딴 섬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청령포라고 불리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에게는 수라를 올릴 궁녀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울창한 소나무 숲뿐. 단종께서는 소나무로 우거진 섬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자신보다 정순왕후의 걱정을 먼저 하였다.
우리는 급하게 밭에서 옥수수와 메밀로 수라상을 올렸고 우리가 청령포에 도착한지 5일이 지난 후에야 궁녀4명이 도착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더 지나도 단종께서는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였다. 한양에 남겨둔 정순왕후 때문이리라. 단종께서는 종종 뒷동산에 올라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탑을 세우곤 하였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한 설움과 미안함으로 단종은 자주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이곳의 생활도 그렇게 길지는 못하였다. 홍수가 나 거처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풍헌으로 유배지를 옮기자마자 한양으로부터 사약을 받으라는 명이 들려왔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한없이 많은 슬픔을 간직한 왕, 나의 왕이 죽음을 맞았다.
차마 슬픔으로 가득한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하고 동강에 버려졌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고자 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포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왕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신하로서의 예도 다하지 못하다니.
쉽사리 누구 하나 나서는 이 없던 그때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소식을 전해왔다. 단종의 시신을 자신이 거두겠다는 것이다. 그의 단호한 전갈에 마음이 저려왔다. 진작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기 때문이리라.
급히 동강에 버려졌던 왕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엄흥도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전갈이 도착했다. 엄흥도가 생을 마감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 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엄흥도는 그는 무심하게 솟아오르는 소나무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여전히 나의 왕 그리고 우리의 왕을 영원히 지키리라.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빛처럼 어둑한 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다. 차마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는 분이니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다가 조금은 진지하게 묵례를 했다. 가볍게 바람이 일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가 선생을 이토록 추억하는 건 선생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있겠지만 생각이 가진 무게와 선생이 늘 지니고 있던 칼의 무게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라의 한 국민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그 기다란 칼 하나에 온 백성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기에 그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생각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하루에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것이고 그것은 단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백성들의 목숨이고 이는 한 가정의 기둥의 목숨이기 때문에 늘 고뇌에 차있고 누구보다 두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눈을 뜨고 감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말 한마디에 수백만의 목숨과 나라가 달려있었기에 태산 같은 두려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으리라.
그래도 그가 그의 삶을 다하는 순간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긴 칼로 누구를 벨 것인가. 내가 베고 있는 것이 적장의 목숨일까 혹 자신의 삶이 아닐까 선생은 하루에 수도 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직분을 숙명처럼 고스란히 받아냈다.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갑옷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고 고된 삶 때문에 선생은 지친 몸을 뉘일 때도 차마 그 짐을 내려놓지 못했다. 언제든 일어나 적과 맞설 수 있도록 갑옷을 입고 칼을 옆에 두었을 것이다.
날이 점차 밝아졌다. 조금은 무거운 바람이 일자 대나무 숲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늘 한적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고 조용했다. 짙은 안개가 발아래 깔린 것만큼 진중하여 숨소리 한번 내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다.
내가 가진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무게는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이렇게 힘들어 하냐고 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싶을 때 이곳을 찾곤 한다.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낼 때. 이곳을 찾아 그분을 생각한다.
한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이곳을 찾으면 큰 위로를 받곤 한다. 그분의 칼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
날은 이제야 겨우 한낮의 빛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친구의 전화다.
“어디야? 지금 너희 집 근천데 나올래?”
“나 지금 아산이야.”
“너 또 현충사 다녀오는 길이야? 너도 참 대단하다. 사실 장소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매번 갈 때마다 새로워?”
“장소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니까. 네가 뭘 알겠냐.”
“학교에서도 존경하는 위인하면 한결같이 이순신장군이라고 쓰더니... 그래서 언제 올라오는데?”
“지금 가는 길이야.”
다시 이곳을 찾을 때에는 내 삶의 무게에 대한 답을 들고 오고 싶다. 그리고 선생과 함께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거실이 시끌시끌했다. 방 안에서 잠시 무슨 소린지 들어보니 손자가 어딜 놀러 가자고 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 그냥 가고 싶은 데 가게 두지 그러냐.”
내 말에 며느리가 손사래를 친다. 학교에서 고장의 이름 난 장소에 가 보고 기행문을 써 오라고 했다는데, 글쎄 수혁이 고 놈이 용인하면 에버랜드 아니냐며 놀이동산에 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속촌에 가면 어떻겠냐는 며느리의 말에, 손자는 민속촌에 가겠다고 한 친구가 반에서 열 명이 넘는다며 싫단다. 며느리는 또 에버랜드도 반 친구들이 스무 명은 가겠다며 되받아치고, 실랑이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게다가 때마침 일터에서 돌아온 아들놈은 할아버지까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실 수 있는 곳으로 다 같이 가자고 하니, 이것 참 큰일이다.
수혁이는 토라진 듯 방에 들어가 한참이나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다들 마음에 들어 할 거라면서 개선장군처럼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결국 주말에 나서기로 한 곳은 호박등불마을이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일단은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묻자 수혁이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한다.
“여기가 호박도 유명하고, 등잔 박물관도 유명하고, 또 숯가마도 유명하대요! 그런데 전 은하초코기사단 가서 초콜릿 만들 거예요!”
“그건 안 돼. 엄마가 벌써 호박 떡케잌 만들기 체험 신청 해 놨거든.”
차 안에서 또 한 바탕 난리가 났다. 아들은 그냥 하하 웃는다. 시끌벅적한 것이 우리 집의 장점이기는 하다만, 무슨 일을 벌일 때마다 이렇게 난리가 나니 늙은이로서는 귀가 아파 견디기가 힘들다.
내 행선지는 벌써 등잔 박물관으로 정해진 모양이었는데, 내가 적적할까봐 아들이 같이 가겠다는 것을 그냥 수혁이랑 수혁이 엄마 따라 가라고 보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이는 엄마랑은 말도 하지 않겠다며 호박등불마을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도 입이 비쭉 나와 있었다. 아들이 가서 중재를 해 주지 않으면 기껏 신청했다던 체험 학습도 다 망치고 올 판이었다.
호박등불마을 체험장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등잔 박물관이었다. 체험장으로 들어가는 수혁이와 아들 내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등잔 박물관으로 향했다. 등잔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십 여 년 전 쯤에 어머니는 호롱불을 밝히고 바느질을 하셨다. 따뜻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어린 아들을 소중히 뉘이고 밤이 늦도록 다소곳하게 앉아 옷감들을 매만지셨다. 이제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새삼스럽다. 물론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수혁이와 며느리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종종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생각하고 감정이 북받쳐 오를 시기는 진즉에 지났다. 다만, 호롱불 아래 일렁이던 어머니의 그림자와 고운 옆모습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장승과 연못가의 석탑을 거쳐 걸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뒤를 돌아다보며 혹시 수혁이랑 아들 내외가 시간 저편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내가 등잔불 아래의 열 살 배기로 돌아가 버린다면, 지금 저 귀여운 열 살 배기도 사라져버리겠지. 웃음이 나왔다. 암, 할애비는 그냥 수혁이 할애비지.
씩씩하게, 하지만 느린 걸음으로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냄새가 시간을 건너온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박물관 앞마당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만치서 수혁이가 달려와 입에 뭘 쑥 넣어준다.
“할아버지, 내가 만들었어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며느리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하고 쫓아오는 통에 수혁이가 도망을 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껄껄 웃었다.
저녁때가 다가와 장 보러 나갈 준비를 하자 어린 아들이 또 마트에 가자고 성화였다.
“엄마는 마트 말고 시장 갈 거야. 같이 갈래?”
“싫어! 시장은 냄새난단 말이야!”
아이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내 오늘 저 녀석의 볼기짝을 때려 주리라 결심하고 뒤를 홱 돌아보았는데, 일곱 살 밖에 안 된 쪼끄만 게 눈치는 또 삼단이라 벌써 제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내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최신 전자기기를 반에서 가장 먼저 갖게 되는 것도 언제나 나였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끔히 다려 준 교복을 입고 등교했으며, 방과 후 교문 앞에는 항상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고, 내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남들에게 없는 것도 다 있었고, 갖고 싶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나날이 콧대가 높아져만 갔다.
어느 날은 교문 앞에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없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아버지께 이 일을 다 일러바쳐서 혼쭐이 나게 해 주리라고 벼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영희야, 넌 안에 들어가 있어라.”
한 번도 내게 엄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던 아버지였는데,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 준 일이 있는데, 모르는 새에 아버지 앞으로 빚이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게를 팔고 새로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어딘가로 떠나셨다.
갑작스레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은 불만이었지만, 전에 사 두었던 워크맨 같은 것들이나 외국에 다녀온 이야기들로 쉽게 새 친구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새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는 모두들 나를 부잣집 딸로 알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고기반찬이 하나도 없는 밥상 앞에 앉을지라도, 학교에서만은 여전히 내가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큰 약점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할머니가 나물 장수라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맡아 키우시게 된 이후로 밤낮 없이 나물을 캐러 다니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싫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매일같이 내 교복을 다려주셨지만, 우리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보다도 낡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교하던 나는 저 만치 멀리 길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강아지, 지금 끝난 거여?”
할머니는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드셨지만,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상한 할머니네.’하고 시치미를 뗐다. 할머니는 내가 보낸 경멸의 시선을 빠르게 알아차리셨고, 내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다.
이 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가세가 회복되어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까지 나는 한 번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물을 다 팔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내게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우리 강아지, 배고팠지?’하시면서 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철없던 행동들을 반성했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걷다 보니 어느 새 시장 입구였다. 간판까지 내 걸고 깔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지만, 거기에 서 계시는 노인들의 모습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아이고, 오늘도 나오셨네. 봐봐. 오늘은 고사리가 아주 싱싱해.”
허물없이 건네는 인사들과 웃음이 오갔다. 나는 이 반듯한 신식 시장과 그 안에서 어우러져 피어나는 구수한 웃음들을 보며, 새침데기 고등학생이던 나와 우리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 때 웃으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더라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몇 갑절은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 동네에는 더 많은 마트가 들어서겠지만, 나는 그 때에도 골목을 누비며 시장을 찾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귀퉁이 어딘가에서, 또 어느 할머니에게 나물 한 봉지를 사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