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오후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언젠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직접 받아보니 기분이 묘하다. 언젠가 입영통지서를 받으면 부모님께 호들갑을 떨며 알리고 친구들에게 진짜 사나이가 된다며 자랑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으나 막상 받아보니 조심스럽다. 일단은 책상서랍에 넣어둔다.
머리를 먼저 깎아야하나, 어떻게 기른 머리카락인데. 아니다. 여자 친구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된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국방의 의무는 당연하건만 새삼 우리나라가 전시중임을 깨닫는다. 분단 그리고 전쟁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맘때 남자들도 이런 기분일까? 괜스레 이등병의 편지를 흥얼거려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뭉클하다.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된다. 문득 옛날 강원도 철원에 갔었던 생각이 난다. 유난히 군부대가 많았던 곳. 차가운 바람이 서늘하게 감돌지만 따뜻했던 곳이 철원이다.
철원 땅을 밟았을 때 서늘하지만 맑은 바람을 스읍하고 마셔보았다. 상쾌하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면 조금 추웠을 날씨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나는 유원지에 놀러 가면 재미삼아 소총으로 인형을 맞추어 보곤 했다. 그런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실제 총을 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다시 찾은 철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물이 흘러가는 소리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곳은 수십 년 전 총성으로 가득했던 곳. 지금도 그 기운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총성의 여운보다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물결이 번지는 곳이기도 하다.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를 시작으로 안보관광을 떠났다. 두 번째로 들린 곳은 제2땅굴로 한국군 초병이 경계 근무를 서던 도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굴착 끝에 발견한 땅굴이었다.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로 땅굴을 살펴보니 앞으로 군 생활을 미리 만나보는
세 번째로 들른 곳은 철원 평화전망대였다. 남북의 그리운 석별의 정이 녹아있는 평화전망대는 북녘 땅의 북한군 초소를 볼 수 있으며 철새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토교저수지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새들은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고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본다.
남자가 군대를 다녀오면 왜 진짜 사나이가 되었다고 말할까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묵묵히 시간을 보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지만 국민이라는 이유로 목숨 바쳐 훈련하고 전투를 하기 때문일까.
철원에서 다시 서울로 내려오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에 올라타고 잠시 생각해본다. 이 기차가 마지막으로 본 월정리역에 있던 기차라면 어떨까. 만약 정말 이 기차가 서울행이 아닌 저 북쪽의 어딘 가라면.
힘찬 경적소리가 울리고 기차가 움직였다. 눈을 감았다. 오롯이 기차의 움직임만을 느꼈다.
어디로 가는지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방향을 생각하니 뒤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짙은 풀색의 비니를 벗고 머리를 매만져본다. 까끌까끌하다.
집에 도착한 나는 식탁에 입영통지서를 올려놓았다.
높고 큰 백화점 사이로 바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많다. 각자 유니폼을 챙겨 입고 나타난 것을 보니 오늘도 꽤 중요한 경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저 멀리서 형준의 모습이 보였다. 혜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형준과 혜연은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학창시절 당시에는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나 얼마 전 동창회에서 만나면서 둘은 새삼 가까워졌다. 30대를 넘긴 나이라 그런지 거리감이 없었고 이야기도 훨씬 잘 통하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니 직장은 어떠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의 시간을 추억하다 자연스레 서로의 취미에 대해 물었다.
“나 쭉 야구부였던 거 알지? 물론 지금은 선수로 생활은 못하지만 주말이면 거의 프로야구 보러 잠실에 가.”
“아 맞다! 너 야구부였지? 유니폼 참 멋있었는데. 근데 난 잠실에 살면서도 야구는 한 번도 보러 간적이 없어. 기회가 없기도 했고 딱히 응원하는 구단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래? 그럼 나 이번 주 주말에 야구 보러 가는데, 같이 갈래?”
저 멀리서 혜연이 급하게 달려왔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미리 티켓을 준비해 온 형준을 따라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각자가 응원하는 선수의 등번호가 박힌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빽빽하게 자리를 채워나갔다. 형준도 맥주 두 캔과 치킨을 들고 미리 끊어놓은 티켓의 좌석을 확인했다. 경기 시작 전 임에도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 정말 많다. 야구가 인기가 많긴 하구나.”혜연이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선수들이 몸을 풀기위해 나왔고 시구를 하기위한 연예인이 등장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시구구나!”
“크큭, 야구 처음 보러 온 것 제대로 티내네. 곧 경기 시작이다. 가볍게 맥주 한 잔으로 시작해 볼까?”
사람들은 시구에 열띤 환호를 보냈고 형준은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며 경기 관람을 위한 워밍업을 했다. 드디어 1회 초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 룰을 잘 모르는 혜연을 위해 형준은 자상하게 룰을 설명해 주었다. ‘사실 야구는 던지고 치고 뛰고 잡는 게 다야’라며 한줄 정리를 해준 것이 다였다. 혜연은 룰을 잘 몰랐지만 사람들의 분위기와 경기의 긴장감에 지루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경기가 시작되며 구단을 응원하는 치어리더들이 나왔다. 사람들은 응원단장의 구호에 맞춰 목청껏 선수들의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사람들이 왜 야구장에 오는 지 알 것 같아.”
“그야 재밌으니까.”
“맞아. 재밌으니까.”
5회 말 경기가 끝났을 때 야구장의 꽃 ‘키스타임’이 돌아왔다. 가장먼저 전광판에 잡힌 커플은 백발의 노부부였다. 할머니는 쑥쓰러운 듯 손사래를 쳤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은 노부부에게 열띤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두 번째 전광판에 잡힌 커플은 20대 귀여운 커플이었다. 당당하게 이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세 번째는 귀여운 엄마와 아들이었다. 신체보다 훨씬 큰 유니폼에 귀여운 야구모자를 쓴 아이는 엄마 입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혜연은 기분이 참 묘했다. 물론 야구장엔 2~30대 젊은이들이 훨씬 많았지만 아이부터 노인까지, 가족부터 연인까지 그 세대도 참 다양했다.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건전한 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웠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전광판을 바라보는데, 키스타임의 마지막 커플로 형준과 혜연이 잡혔다.
사실 둘이 함께 왔으니 카메라를 잡아주는 사람도 둘이 커플인지 친구인지 알 길은 없었다. 혜연은 놀란 마음에 손사래를 쳤으나 형준이 돌연 혜연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작게 “원래 이런 데 와서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속삭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를 보내자 혜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열띤 응원을 하는 형준과 달리 혜연은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서른 넘은 나이에 주책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나 왠지 형준이 조금은 달라보였다.
경기가 끝이 나고 형준이 응원하던 구단이 승리를 얻자 형준의 기분은 더욱 좋아보였다.
“야구장 처음 와본 소감이 어때?”
“음, 재밌었던 것 같아. 다음에 오면 응원도 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고!”
“너도 이 매력에 푹 빠졌구나. 다음에 또 오자! 그땐 제대로 더 신나게 놀다가자고.”
“으응.”
형준과 돌아오는 길에 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늙음을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노부부. 가족이 함께 유니폼을 맞춰 입고 목마를 타며 목청껏 응원하는 가족. 사랑하는 연인과 보내는 주말.
‘야구장. 참 재밌는 곳이네.’라며 혜연은 잠시 중얼거렸다.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거리에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들썩임이 가득했고 언제나 돌아오는 연말연시였지만 사람들은 늘 같은 흥분과 설렘으로 시간을 보냈다.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은 영하의 온도에 아랑곳하지 않듯 붉어있었고 저마다의 한 해를 안주삼아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한테 연락 왔어? 경찰서에서는?”
“아직.”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우리는 엄마를 찾고 있다. 알츠하이머 중기 판정을 받은 후로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탓에 이렇게 가끔씩 집밖을 나가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연말연시라 경찰들도 우리엄마를 찾아주기엔 할 일이 많았는지 자꾸만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혹시 엄마 거기 가신 거 아니야?”
“어디? 생각나는 곳이라도 있어?”
“왜, 엄마 요 근래 자꾸 기차, 화본역! 그러지 않았어?”
해가 떨어졌어도 한참 전에 떨어져 달빛과 가로등 불빛으로만 시야를 분간해야 했다, 자그마한 대합실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시계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겨울 막바지라 금방 손발이 얼어붙듯 차가운 날씨였는데 엄마는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엄마의 기억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기에 여기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걸까. 치매 초기 때에는 밤이 오는 것이 무섭다며 방에 불도 못 끄게 했던 엄마였다. 엄마가 깊게 잠이 들어서야 불을 끌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자다 깨면 누가 불을 껐냐며 불호령이었지만, 그랬던 엄마가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간이역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눈빛에 무서움과 두려움은 없었다.
“엄마, 왜 여기와 있어. 기차타고 어디 가려고?”
“기다려. 기다리고 있어.”
“누구를 기다린다는 거야. 오밤중에. 정말 속상해 죽겠어.”
“마중 간다고 했어. 이제 곧 올 거야. 기차소리 들리잖아.”
“무슨 이 시간에 기차소리가 들린다 그래! 정말, 집에가, 빨리 일어나라고!”
“저리가. 마중 간다고 약속해서 기다려야해.”
엄마는 단호하게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추위도 잊은 채 오지 않는 기차를 아니 누군가를 마중가야 한다고 했다. 노인네가 고집만큼이나 힘이 얼마나 센지 두 팔을 힘껏 잡아당겨도 꿈쩍도 안했다.
엄마는 낑낑거리며 거기 남아 있겠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엄마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하여 겨우 집으로 모시고 왔다. 집으로 오는 중에도 엄마는 계속 기차소리만 연발했다.
그날이후로 엄마가 또 한 번 사라진 적이 있다. 이번에는 경찰서에도 연락하지 않았다. 엄마의 기억이 머물던 자리로 갔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도 집에 안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면 어쩌나 하고 화본역으로 달려갔고 엄마는 그 자리에 계셨다.
어쩐지 엄마가 조금 이상했다. 눈빛도 또렷했고 기차고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엄마, 거기서 뭐해?”
“왜 또 왔어. 어련히 집에 안들어갈까봐서.”
“우리엄마 맞네. 저번부터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는 거야? 누구 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어?”
“보고 싶은 사람이라. 보고 싶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내 새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어렸을 적 큰오빠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유괴인지 실종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삼십년 째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를 이제야 마중 나가겠다며 기억을 잃은 그 순간에도 엄마는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그렇게 다섯 살 난 아들을 잃은 엄마는 구슬프게 우셨다. 그리고는 다시금 기차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기찻길로 뛰어들었다. 기차는 오지 않았지만 엄마는 자리에 쓰러지셨다.
‘엄마가 마중 갈게. 조금만 기다려.’그렇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셨다.
달빛이 그대로 비치는 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옆에 턱 와서 앉았다. 희끗하게 센 턱수염을 거칠게 깎은 박 씨 아저씨였다.
“강 씨, 오늘도 나왔네 그려.”
“박 씨 아저씨도 여전하시네요.”
오늘도 한적한 동네 냇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았다. 냇가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의 큰 지류여서, 우리 동네의 숨은 낚시꾼들에게는 아주 중한 장소였다.
퇴직 후에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 수도권 언저리의 한 동네로 내려 온 것이 이래저래 좋은 선택이 된 셈이다.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이사를 온 뒤에도 한동안 동네 사람들과 소원하게 지냈는데, 달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나란히 앉으니 자연스레 이야기꽃이 피는 것도 이 밤낚시의 묘미 중 하나였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전문적으로 파고들 정도는 아니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다들 혼자 집에 있기가 심심하니 그저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하며 낚싯대 하나를 챙겨 냇가에 나왔는데, 어느 새 이 ‘낚시꾼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이가 고만고만한 중늙은이들이 전문적인 장비도 없이 나란히 낚싯대를 내리고 있으니, 고기를 잡는 일도 드물었다.
“옛날에는 물속으로 그냥 뛰어들어 손으로 잡아 올려도 월척이었는데 말이야.”
박 씨 아저씨의 농담에 다들 말문이 트였다. 아마 우리가 몇 번이고 터뜨리는 웃음소리에, 잡힐 고기들도 다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 재밌자고 하는 일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다.
그래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니 조금은 고기 잡을 욕심이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낚싯대를 바꾸고 미끼를 바꿔가며 애를 써 봐도 소득이 없더니, 어느 날은 항상 웃음을 주도하시던 박 씨 아저씨가 물골에서 손바닥만 한 붕어를 낚아 올리셨다. 박 씨 아저씨는 제가 고기를 잡고도 놀라신 모양이었다. 매일 농담만 주고받느라 낚시는 뒷전이었던 우리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물론이다.
다음 날, 낚시꾼 모임 멤버들이 나만 빼 두고 무슨 계획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실상 나만 빼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가장 늦게 이사 온 나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엿듣는 모양새가 되어 한참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다가, 성이 나서 나도 무슨 이야기인지 좀 알자 했더니 모두가 껄껄 웃었다.
“그래, 강 씨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모르는 이야기겠네. 여기, 김 씨 아저씨 고향이 저어기 부산에 있는 가덕도인데 말이야. 거기 숭어들이가 아주 유명하다고 해서 작년부터 한 번 가 볼까 하고 있었지.”
“며칠 전에 박 씨 아저씨가 붕어를 낚았잖아? 그거 보고 이야기로만 들었던 숭어들이가 생각 난 거야. 마침 가덕도 숭어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기에, 거기나 한 번 가 볼까 하고. 강 씨도 갈 거지?”
먼 길 여정이 달가운 나이는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조금 꺼려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니, 배 수 척으로 바다를 둥그렇게 싸고, 숭어가 지나 갈 때에 그물을 들어 올려 잡는 것이 숭어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는 다들 고기를 이렇게 잡았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 것은 가덕도가 유일하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낚시도 고기를 찾아 가서 잡는 게 아니라, 고기가 바늘을 물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우리에게 딱 맞는 축제지. 안 그런가?”
박 씨 아저씨의 말에 또 다들 웃음보가 터졌다.
축제 날짜에 맞추어 부산으로 떠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박 씨 아저씨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자꾸 어른거렸다. 숭어들이는 어류장이라는 분이 있어, 그 분이 한 평생 동안 고기가 가는 길을 알려주신다 하였다. 망망대해를 보고 있다가도 숭어 떼만 지나가면 기가 막히게 바다 위의 배들에게 신호를 보내 주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낚싯줄을 곱게 감아도 보고, 낚싯대를 행주로 박박 문질러 닦아도 본 끝에 전화기 앞에 섰다. 저녁만 되면 낚시를 하러 나온 것은, 저녁만 되면 울리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나는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한 번 들었다 놓아 보았다.
내일 낚시꾼 모임은 하루 쉬어야겠다. 내일도 숭어가 올 터이니, 내가 그 고기를 한 번 낚아보아야겠으니 말이다.
엄마는 시든 꽃처럼 좀체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얼마 전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임이라는 이름으로 등 떠밀려 퇴사를 하시고는 집에서 가사일 만하는 전업주부의 삶에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하셨다. 나와 언니, 오빠는 이제 그만 집에서 쉬시라고 그만큼 자식들 뒷바라지 하며 사셨으면 됐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일에 매진 하냐고 했더니 엄마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신다.
“자식들 뒷바라지 때문이 아니야. 니들은 니들이 알아서 사는 거고 나는 내 알아서 사는 거지. 자고로 사람은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럼 엄마 잘하는 그거 있잖아. 비즈공예랑 뜨개질. 그거 예쁘게 만들어서 저기 예술의 거리에서 가게 하나 얻어서 그거 파는 건 어때?”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홀로 우리 삼남매를 키워야 했다. 엄마는 자식들 뒷바라지를 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홀로 삼남매의 의식주와 교육까지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인생에서는 쉼표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뛰어야 했다. 아주 잠깐 쉰다고 하면 우리 오빠랑 언니가 고3 수험생일 때 밤늦게까지 공부한다고 해서 같이 밤을 새며 뜨개질이랑 비즈공예를 하며 본의 아닌 취미를 만들어 나가신 것 빼고는 없었다. 사실 엄마의 인생에서 봄이 있었을 까 싶을 정도로 엄마는 참 힘들고 바쁘게 사셨다. 그런 엄마보고 이젠 좀 쉬시라고 해보아도 소용이 없다. 어찌 지난 25년간의 삶의 패턴이 쉽게 바뀌기야 하겠느냐며. 그러던 중 언니는 나름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엄마가 손재주가 좋다는 것을 이용하여 퇴직금으로 받은 돈과 우리 삼남매가 돈을 보태어 작은 공방 아닌 공방을 차려드리는 것이다.
“예술의 거리? 내가 뭐 예술가도 아니고 이건 그냥 취미라 누가 사가는 사람도 없을 텐데. 잘 될까?”
“그러니까 공방에서 아줌마들 모아서 만드는 법도 알려주면서 팔찌나 목걸이 뭐 그런 거 파는 거지.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꽤 잘 되던데? 엄마 실력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 트렌드가 요런 복고거든. 그래서 딱 좋은 것 같은데?”엄마는 이렇게 나누는 말 뿐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생기를 되찾으신 듯 했다.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진취적인 결정으로 일을 밀어붙일 때이다. 엄마는 약 일주일간 이곳저곳을 알아보시며 신중히 고민을 하신 끝에 우리 삼남매를 불러 앉혀놓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예술의 거리에 10평 남짓한 공간에 세를 받아 가게를 차렸다. 작은 평수임에도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꾸며 놓으니 제법 괜찮아보였다. 옆에는 작은 소극장들이 있어서 공연을 기다리는 젊은이들이 구경하며 몇 개씩 구입하기도 하여 목도 괜찮았다.
한 4개월 쯤 되니 차차 단고로 생기고 옆 가게 아주머니들과도 친목을 쌓았다. 엄마는 완전히 만개한 꽃처럼 생기를 되찾으셨다.
“어서오세요. 아, 정선생님 오셨어요?”
엄마가 정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엄마 가게 앞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시는 늦깎이 남자 배우이시다. 정선생님도 회사 정년퇴임을 하시고는 소싯적 꿈을 펼치시고자 공연장에서 배우로 활동하게 되셨다고 했다. 마침 공연장에서는 노년의 삶에 대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당히 오디션도 합격한 엄연한 배우이시라며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정선생님께서는 공연 준비 한 두 시간 전에 엄마 가게에 놀러 오신다고 했다. 두 분은 가끔 차를 마시며 담소도 나누시며 가깝게 지내시는 것 같았다. 나와 언니도 엄마 가게에서 정선생님을 한 번 뵌적이 있었는데 중후한 외모에 인품도 좋은 신 것 같고 무엇보다 정선생님도 몇 해 전에 아내와 사별하여 혼자라고 하셨기에 슬쩍 엄마에게 잘해보라는 말을 건넨적이 있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아, 박여사님. 저기, 오늘 혹시 시간되시면 제 공연 보러 오시지 않을래요? 오늘이 제가 주인공으로 서는 마지막 공연이 될 것 같아서요.”
“아, 그러세요? 그렇담 가야지요. 8시 반 공연이라고 하셨나요?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엄마는 8시에 근처 꽃가게로 가셨다. 아마 정선생님께 드릴 꽃다발을 사시는 것 같았다. 엄마는 밝게 웃으셨고 왠지 엄마에게 여러모로 두 번째 봄이 온 것 같았다.
나의 오래된 꿈 중에 하나는 바로 시인이다. 시는 곧 인생이며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여겨왔던 나는 늘 항상 옆구리에 오래된 시집 하나를 끼고 다녔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인지 시를 쓰며 세상을 그리고 현재의 환경을 비뚤어진 필체로 휘갈겨 쓰며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도 나는 내 인생이 탄탄대로의 삶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남들처럼 멋지게 시 한편 적어 신춘문예 당선은 물론 등단작가로서 시나 읊으며 살 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 그저 그런 글쟁이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도 조금의 위안이 된다면 국문과를 졸업했다는 희미한 스펙으로나마 자그마한 신문사에 취직을 하여 20여 년간을 묵묵히 시 곁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간간히 내로라하는 신문사의 이름을 달고 올해는 누가 신춘문예 당선이 됬다더라 누가 새로운 시집을 발간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저 밑바닥에 있던 꿈이 불쑥 하고 올라왔다 다시금 잠잠해지는 것 빼고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달까.
대학시절 나는 내 친구와 함께 ‘담쟁이’라는 시와 문학이라는 동아리에 가입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치 80년대 영화처럼 빙그르르 모여 앉아 서로의 시를 감상하며 우수에 젖어들곤 했다. 나는 그곳에서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좋아했기에 그녀에게 들려줄 만 한 시를 쓰느라 밤새 몇 장의 종이를 찢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내 친구 녀석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가 좋아서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 모인 동아리 모임이 피 튀기는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을 무렵, 내 친구가 ‘소녀’라는 시로 발표를 할 때였다. 동그랗게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시의 소녀가 그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와 그 녀석뿐이었다. 어쩐지 그녀는 ‘소녀’라는 시를 무척 좋아했다. 이후 나는 제대로 된 게임도 못해보고 뒤로 물러나야 했고 동아리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탈퇴를 하였다. 이후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친구 녀석은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잘 먹고 잘산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서일까 그 친구 녀석에 대한 질투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저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잘 먹고 잘 산다는 그 말에 잠시 동안 생각이 멈춰있을 뿐이었다.
“김부장님, 부장님도 소싯적에 시 쓰셨다면서요? 그럼 신춘문예 같은데 넣어보시지 그러셨어요. 아참, 이번에 칼럼대신에 <소녀>로 등단한 시인B님 시가 연재 될 예정이라는데 부장님 아는 사람일 거라고 하던데요?”
모르는 이야기다. <소녀>로 등단한 시인B라 하면 그 녀석인가 보다. 갑자기 내 책상서랍 제일 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시집이 생각났다. 그리고 가끔씩 시를 끼적이던 습작노트도 보기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분명 그 녀석에 대한 질투는 사라지고 난 뒤였는데.
나는 퇴근길에 언젠가 가보겠다며 벼르고 벼르던 시인의 길로 발길을 돌렸다. 젊은 날엔 호기롭게 여기에도 내가 쓴 시가 당당하게 한 자리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 이야기 하고 다녔는데 어쩐지 나는 이 길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녀석이 이 길의 중심 돌이라면 나는 그 곁에 머무는 나무 하나에 지나치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시인의 길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지만 나는 이때까지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시의 그리고 시인의 언저리에서 머무는 삶처럼 살다 가려는 마음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무언가를 생각하기엔 짧았고 하나하나 음미하며 걷기엔 조금 길었다고 하면 맞겠다. 오늘의 기분을 시로 쓴다면 어떨까 하고 잠깐 생각해봤다. 어쩐지 육두문자를 머금고 들어선 시인의 길에서 지금 이렇게 길 마지막에 서 있는 지금은 나름 홀가분한 기분이 더 컸다.
시인의 길. “다 좋은 말들뿐이군.” 하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여중생들의 무리가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분위기 확 깬다는 생각을 하며 획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여중생들은 시인B, 그러니까 내 친구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야, 너 <소녀>읽어봤어? 그것도 시라고 썼냐? 촌스럽게.”
“원래 시는 촌스러운 거야. 몰라? 그리고 그 사람 나이가 있잖아. 그 정도면 봐줘. 그리고 요즘 누가 시를 사서 아냐? 그냥 교과서에 나오는 거나 대충 읽다 마는 거지. 그것도 시험에 안 나온다고 하면 시따위 그거 읽지도 않아.”
여중생들은 몇 마디 나누지는 않았지만 꽤나 마음에 맺히는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시인B의 시를 제멋대로 평가하면서 말미에는 시따위라며 시를 철천지원수인양 떠들어댔다. 나는 그 여중생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재빨리 시인의 길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시로 쓰여진 그 길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한동안 쓰지 않던 ‘시 한편을 써야 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눈 깜짝할 새에 또 신년이었다. 맥주 한 캔을 사 와서 안주 없이 마시며 텔레비전으로 제야의 종 치는 걸 구경했다. 혹시 핸드폰이 울리지는 않는지 계속 확인 해 보았지만 별다른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들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차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혼잣말을 하며 이어지는 축하 무대를 본다. 벌써 삼 년 째 혼자 맞는 신년이었다.
“이런 호수 말고, 애들이 빨리 바다를 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내가 농담처럼 꺼낸 한 마디가 시작이었다. 우리 부부 모두 대학을 나오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이래저래 불편한 점도 많았고, 서러운 경우도 많이 당했었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계획을 준비한 듯, 일사천리로 서류 준비를 끝내고 아이들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입버릇처럼 ‘우리 애 교육만은’하고 되뇌었었는데, 막상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보낼 때에는 그 앞에서 펑펑 울지 않은 게 용하다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부럽지 않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기로 신혼 때부터 약속해 온지라, 떠나는 가족들 앞에서 서운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나는 그렇게 기러기 아빠가 되었다.
새해 아침에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호숫가로 나섰다. 날이 꽤 추워 현관문을 열면서부터 옷깃을 손으로 꽉 여미고 나섰는데, 막상 나서보니 맑은 공기가 상쾌했다. 며칠 째 내리던 눈도 이제는 모두 그친 모양이었다.
가족 단위로 호수를 보러 마실 나온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나 많았다. 호수의 얼음 위를 걸어보겠다고 조심스레 한 발짝씩을 내 딛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이 부모 손에 매달려 웃는 모습을 보니 코끝이 아려왔다. 우리 아이들도 딱 저만할 텐데. 아니, 못 본 지 삼 년이나 되었으니 아마 머리 하나는 더 자랐을 것이다. 서러워하지 않기로 했는데, 외로움은 내 힘으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호수에 눈이 덮인 모습이 마치 저 멀리 남극 대륙에 온 것 같았다. 그 신비로운 모습을 렌즈에 담으려 애쓰는 남자도 보였다. 저 앵글 속에 내가 들어간다면 안성맞춤일 것이다. 목을 움츠린 내 모습은 펭귄을 닮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가족으로서의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약이다. 하지만 수 년 간 쌓여 온 외로움이 사람을 점점 더 비관적이게 하고 있었다.
혼자서라도 떡국을 끓여 먹어야 하나, 친구를 만나 볼까.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져 있는데, 저 멀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비닐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곳이라더니, 철새들이 먹을 모이를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다가가 보았다.
“저어, 저도 한 번 해 볼 수 있을까요?”
그들은 선뜻 준비되어 있던 봉투들 중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며 요령을 알려준 뒤, 제각기 몇 마디씩을 건넸다.
“겨울이니 청둥오리나 쇠오리, 쇠기러기 같은 녀석들이 찾아 올 거예요.”
“여기 사는 녀석들도 아니고, 한 철 잠시 다녀가는 녀석들이지만 반갑게 맞아 줘야지.”
나는 그들이 모두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들도 어딘가에 돌아올 사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들의 길목에 서서 다른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언 땅에 모이를 흩뿌렸다.
벚나무 가지에 쌓여 있던 눈이 머리 위로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나는 이른 봄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벚나무 밑에 서 있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벚나무에서는 꽃잎이 흩날릴 것이다.
왠지 경상도 남자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것은 시골아이가 서울깍쟁이 여학생을 동경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멋들어진 사투리를 쓰고 무뚝뚝한 말투와 행동 속에 배어 있는 세심함이랄까?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떠난 첫 경상도 여행길이다. 포항에 있는 친구에게 내가 내려가니 환영의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버스에 몸을 싣고 유유히 안내팜플랫을 열어보고 있는데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미안, 나 갑자기 세미나가 잡혀서 나대신 내 친구 보냈어. 남자애야.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소개팅이라고 생각해! 이 언니의 예기치 않은 깜짝 선물이다. 좋은 시간 보내!’
소개팅? 좋은 시간? 이걸 말이라고. 황급히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는 무심하게 신호음만 연결할 뿐이었다. 다시금 차를 되돌릴 수도 없고 1박 2일을 혼자 보내기도 겁이 났던 나는 일단 남자가 나와 있을 것이라는 포항터미널에 도착했다.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김수정씨?”
“아, 네.”
이 남자인가보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포항터미널에서 갑작스럽게 만난 남자라니.
“연주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경상도 남자한테 관심이 많으시다고 에스코트 좀 잘하고 오라고 하던데요?”
“아. 연주가 그래요? 아. 뭐..”
연주 이 기집애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보다. 그리고 이 남자. 낯도 안 가리고 싹싹한 면이 있다.
“배 안고프세요? 포항 오셨으면 과메기 정도는 먹어줘야 되는데, 드셔보셨나 모르겠어요.”
“아. 한번인가? 자주 먹어보지는 못했어요.”
“그래요? 그럼 제가 제대로 먹는 법 알려줄게요. 가요.”
그렇게 처음 본 남자와 처음 와본 곳에서 점심을 먹으러 앉아있다. 죽도시장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라며 남자의 추천으로 들어온 집이다. 주문한 과메기가 나왔고 남자는 김과 과메기, 갖가지 채소들을 얹더니 ‘아’ 해보라고 했다. 괜찮다는 대도 자꾸만 ‘아’해보라고 했다. 쌈이 풀어진다나. 그렇게 수줍게 받아먹은 과메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비리지도 않았고 고소한 맛이 감돌았다.
“어때요? 맛있죠?”
“네. 비리지도 않고 생각보다 고소하네요.”
“그렇다니까요. 제가 황금비율로 싸드려서 그래요.”
남자는 그러면서 싱긋 웃는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일일 가이드로 일임한 남자를 따라 포항 이곳저곳을 다녔다. 남자는 경상도 남자답게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정하고 세심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붉은 노을이 하늘을 수놓았다. 일출 명소인줄 알았는데 해가 저무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저,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이렇게 일일 가이드도 해주시고. 이제 그만 들어가 보세요.”
“뭘요. 저도 포항 여행 제대로 했는데요. 참. 내일 오전에 해돋이는 보시고 가셔야죠? 아침 일찍 여기로 나올게요. 해돋이 보고 가세요.”
“네? 아. 괜찮은데.”
“무슨 말씀이세요. 호미곶와서 일출 안보고 가면 여기 왔다고 명함도 못 내밀어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일 6시 10분까지 나오겠다며 내일 보자고 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호의인가. 아니면 무엇일까.
다음날. 약속했던 시간이 약 30분이 남았음에도 모든 준비를 끝냈다. 애꿎은 시계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드디어 6시. 호텔 로비를 서성이는데 남자가 나와 있다.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코끝이 살짝 빨갛다.
남자는 곧 해가 뜬다며 슬며시 내 손을 잡고 일출 명소로 뛰었다. 호미곶의 상생의 손 사이로 붉은 해가 솟아올랐다. ‘와.’ 속으로 감탄을 삼키고 있는데 남자가 말을 걸었다.
“멋있죠?”
“네. 멋있네요.”
“그럼, 나는 어때요?”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수줍게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