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영릉] 물거품이 되어버린 북벌의 꿈, 효종,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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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영릉] 물거품이 되어버린 북벌의 꿈, 효종


인조와 인열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효종(孝宗, 1619~1659년)은 ‘북벌운동’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국력을 중시한 군주 중 한 명이다. 아버지 인조 때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봉림대군 효종은 1637년 2월 형 소현세자와 함께 8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왕세자인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두 달 만에서 학질(말라리아)로 급서하자 세자에 책봉되었고, 1649년 봉림대군 효종은 제17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아버지의 恨을 풀기 위한 북벌의 꿈

  • 영릉에는 효종이 원했던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꿈이 잠들어있다.

    영릉에는 효종이 원했던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꿈이 잠들어있다.

사실, 효종의 맏형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아직까지도 많은 논란이 오가고 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있는 동안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포로를 교환하거나 각종 연락사무, 공물에 대한 조정 등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 청은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조선의 도움이 필요했다. 병자호란 또한 ‘친명배금’ 정책을 유지한 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해 벌인 전쟁이 아닌가. 소현세자는 이러한 청나라의 이해관계 속에서 일종의 외교관 역할을 하며, 청나라는 조선이 업신여기지 못할 나라로 성장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청이 명을 함락시키고 중국 대륙을 차지하면서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했지만, 조선에서는 소현세자 내외가 왕위를 넘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청은 복수의 대상으로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인조와 서인 세력에게 그런 소문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용서되지 못할 일이었다. 공식적인 기록상에는 학질로 인한 사망으로 되어 있지만, 소현세자의 죽음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소현세자의 병세를 진찰했던 담당 의원이 소현세자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형익이란 사람이었다는 점, 세자의 시신은 학질이 아닌 약물 중독으로 죽은 모습이었다는 점 등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 영릉재실은 효종과 인선왕후가 잠든 영릉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릉재실은 효종과 인선왕후가 잠든 영릉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소현세자가 의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후 즉위한 효종은 아버지가 당한 원한을 풀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총명하여 아버지 인조의 사랑을 받았던 그에게 북벌운동은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북벌론자들을 중심으로 효종은 군사를 양성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탄탄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륙을 장악해 무서운 기세로 성장한 청나라를 공격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우리가 오랑캐로 얕보던 청은 이제 대국(大國)이 되었고, 조선은 그런 청에 무너진 명나라를 섬기던 소국(小國)의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무리한 북벌계획으로 민생고까지 가중되니 북벌을 반대하는 대신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결국, 청나라를 공격하지도, 그렇다고 북벌운동을 멈추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북벌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영릉(寧陵)은 효종과 인선왕후가 잠들어 있는 쌍릉이다.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마찬가지로 효종의 영릉(寧陵) 역시 본래 이곳에 조영된 능은 아니다.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한 후, 같은 해 10월 태조 건원릉의 서쪽에 능을 조영하였으나 아들 현종 때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물이 스며들 수 있다는 우려로 능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된다.

영릉(寧陵)은 왕과 왕비의 능이 한 언덕에 함께 있는 쌍릉의 형식이지만 좌우로 나란히 놓인 것이 아닌 위(효종의 능) 아래(효종 비 인선왕후의 능)로 구성된 동원상하릉이다. 이러한 배치는 영릉(寧陵)이 최초이다. 왕과 왕비릉의 사이가 약간 벌어져 있지만, 능을 둘러싸고 있는 곡담이 왕릉 1곳에만 둘려 있는 것으로 볼 때 하나의 언덕에 조영된 쌍릉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세종대왕의 영릉(英陵)만 둘러보고 효종의 영릉(寧陵)은 무심코 지나간다. 그러나 경종의 의릉(懿陵)과 같은 동원상하릉 형태로 구성된 영릉(寧陵)은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과 어우러진 능선의 아름다움과 포근한 풍경을 연출한다. 청나라에서 볼모의 삶과 평생 북벌의 꿈을 꾸었지만 좌절된 효종에게 편안하게 잠들라는 의미에서 꾸며진 능이 아니겠는가. 또한 대부분 왕릉의 재실이 훼손되어 그 원형을 잃어버렸지만 효종의 영릉 재실은 1673년 건립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왕릉 재실 중에서 유일하게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사를 관장하던 사람들의 휴식과 제수 장만, 제기 보관 등 왕릉에 없어서는 안 될 부속건물이 원형 그대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품고 있으니 반드시 빼놓지 말아야 할 코스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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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그토록 이루고 싶던 북벌이 진행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큰 변화가 있었겠죠?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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