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경릉] 세도정치 속에서 일어난 천주교 탄압과 삼정의 문란, 헌종,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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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경릉] 세도정치 속에서 일어난 천주교 탄압과 삼정의 문란, 헌종


세도가문 척결로 왕실의 중흥을 꾀했던 효명세자의 꿈이 무산되고 순조마저 세상을 떠나자 1834년 어린 헌종(憲宗, 1827~1849년)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조선왕조 역대 가장 어린 임금이었다. 정치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순조 비)가 수렴청정하였고, 정권을 장악한 가문의 성씨(姓氏)만 바뀌었을 뿐 세도정치는 계속되었다. 어린 헌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대왕대비의 탄압 

  • 구리시에는 어린나이에 세도정치에 휘둘렸던 헌종이 잠들어있다.

    구리시에는 어린나이에 세도정치에 휘둘렸던 헌종이 잠들어있다.

안동 김씨(순조)에서 풍양 조씨(헌종) 가문으로 이어지는 세도정치 속에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어느 시대에서나 그랬듯 민심은 자신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상을 전파하는 종교로 향하고 있었다. 천주교가 내세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사상은 민심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고, 계급사회 속에서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한 조정에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17세기 중국 베이징으로부터 들여와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천주교는 잘 알려졌듯이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천주교가 처음 전래한 정조 때는 비교적 천주교에 관대했던 상황 속에서 큰 탄압이 발생하지는 않았으나 순조 때에 이르러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다. 정조의 정책에 편승했던 시파(時派)가 축출되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벽파(僻派)가 등장하면서 실학의 쇠퇴와 더불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1801년 신유박해)이 시작됐다. 이승훈과 정약종(정약용의 형)이 이때 처형되었고, 1801년 10월에는 정약종의 조카사위였던 천주교 신자 황사영은 ‘조선에서 천주교를 정적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한다’며 이에 대한 대비책을 적은 밀서를 청나라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처럼 세도가문에 의해서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헌종 때 극에 달한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때 진행된 대대적 천주교 탄압으로 기록된 기해박해는 프랑스 신부였던 모방과 샤스탕을 비롯하여 100명이 넘는 천주교인을 투옥하거나 처형하였다. 마을의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어 군역이나 세금 징수에 대해 서로 감시하는 오가작통법을 천주교도를 감시하는 데 적용시켜 다섯 집 중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나머지 네 집까지 모두 처벌받도록 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는 종교적 탄압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의 핵심 요소인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인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농민층이 몰락하는 상황을 야기했다. 헌종은 1841년 친정(親政)을 하였으나 곪을 대로 곪아버린 백성들의 삶을 치유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더불어 해안가에는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해 행패를 부리는 등 그야말로 헌종 즉위 기간에는 안팎으로 혼란의 시기였다. 이 당시 출몰한 이양선을 두고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해 여름·가을 이래로 이양선(異樣船)이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 다섯 도의 대양(大洋) 가운데에 출몰하는데,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혹 뭍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거의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헌종실록 15권, 14년 (1848년 12월 29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천주교 탄압의 혼란과 삼정의 문란으로 사실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던 헌종은 1849년 2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동구릉 내에 위치한 경릉(景陵)은 헌종과 헌종의 두 왕비 효현왕후, 효정왕후의 무덤이다. 경릉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로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三連陵) 형태이다. 우측부터 헌종, 가운데 효현왕후, 왼쪽에는 효정왕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우왕좌비(右王左妃)의 원칙을 따른 것이다. 물론 무덤이 조영된 순서는 소생 없이 헌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효현왕후(1828~1843년), 헌종(1827~1849), 효정왕후(1831~1903) 순으로 배치와는 상관없다. 효현왕후와 함께 효정왕후 또한 헌종 사이에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고, 결국 ‘강화도령’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다른 역대 임금들도 많은 계비와 후궁을 두었지만 헌종의 경릉처럼 삼연릉의 형태로 조영된 것은 없다. 그 당시 풍수적 왕릉의 길지 때문인지 헌종과 효정왕후의 사랑이 깊어서 인지는 정확히 할 수 없지만 조선왕릉 40기 중의 유일한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경릉은 동구릉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다.

죽어서도 두 명의 여인을 능에서 품고 있는 헌종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미남에 속한다고 전해진다. 물론, 사진이 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미의 기준과는 많이 차이가 나겠지만 일설에 의하면 헌종의 외모 때문에 젊은 궁녀들 사이에서 서로 승은을 입기 위해 치열한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복상사(腹上死)했을 것이란 견해가 힘을 얻는 것 또한 현종의 출중한 외모 때문이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이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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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에 의해 흔들리는 나라를 지켜보는 헌종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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